영조의 노력인 탕평책과 균역법의

1. 영조

영조는 조선 19대 임금인 숙종의 둘째 아들이다.

장남 경종이 허약하여 일찍 죽자 영조가 왕이 되었다.

농사일을 하는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 때문에 왕위 계승에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다.

그러나 영조는 조선왕조 중 최장기간인 52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면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이 시기에는 붕당정치의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붕당정치는 관료들이 당을 결성하고 권력을 다투는 일을 말한다. 조선시대 유교를 믿었던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서로 싸우고 비판하고 반대하는 정치의 한 형태이다. 붕당은 학문적·정치적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말한다.

붕당정치의 시작은 조선 선조 때 동인과 서인이 인사권을 가진 전랑이조의 입장을 놓고 대립하면서 시작되었고, 이때부터 붕당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져 마침내 동서남북의 4개 세력이 되었다.

분당 분할의 이유는 증가하는 귀족의 수에 비해 관직의 수가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집단 간 대결은 극에 달해 다음 세대가 진출하면서 상대방을 죽이기까지 했다.

붕당정치는 조선후기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분당의 대립이 격화되자 영조와 정조는 분당의 세력을 진압하고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탕평정책을 쓴다.

소속 정당과 상관없이 인재를 모집하기로 했다. 그러나 빨치산 투쟁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1762년 빨치산 싸움이 치열하던 시기에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일 수밖에 없는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졌다.

영조는 학문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가장 많은 경기를 치른 왕이기도 했다. 왕과 신하들이 학문과 국정을 의논하던 곳으로, 왕 재위 기간 동안 3,458회까지 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영조도 백성의 복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왕이었다. 1744년 《신속한 전쟁》의 발간으로 잔혹한 형벌을 소규모로 축소했고, 1751년에는 백성의 병역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견역법을 공포했다. 사람들의 억울한 일을 조금이나마 해결하려고 노력했고, 신문고 제도를 되살렸습니다.

2. 보상플랜

선조시대에 유교를 믿는 선비들이 정치에 전면에 나서자 동인, 서인, 남인, 북의 사색파가 등장하고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어 정치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정당정치가 정당 비판과 상호 견제라는 좋은 쪽으로 흘러갔지만, 나중에는 반대 세력을 죽이는 등 점차 강도가 세졌다.

이 문제가 계속되자 해결책이 나왔다.

탕평(唐平)이란 왕의 정책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특정 세력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고 공평한 상태를 말한다.

노론과 소론의 난폭한 대결을 막기 위해 영조는 각 진영에서 동등한 인재를 임명했다.

분당의 권력은 점차 약해졌고 왕의 인신권은 강화되었다.

영조 이후 정조는 탕평정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죽은 뒤 탕평책이 실권을 잃으면서 세조의 외가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정책이 등장했다.

영조와 종조가 왕권강화에만 몰두하고 제도개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진한 결과를 낳았다.

3. 세균법

이 제도는 1750년 조선 영조 때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견역법이란 병역을 선택하는 법을 말하며 입대를 의미합니다.

조선 초기에는 16세에서 60세 사이의 남자는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군에 복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후기 직업군인이 늘어나면서 군복무를 대신해 1년에 2필, 1군포를 생산해야 했다.

그러나 양반들은 온갖 핑계를 대며 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신 농민들이 총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군포를 받은 관리들은 병역에 징집되지 않은 아이들이나 죽은 자들을 위해 그것을 소유하기도 했고, 도망친 사람들은 대신 친척이나 이웃에게 주었다.

날이 갈수록 농민들의 부담이 커지자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영조는 무기 하나만 발급하면 되는 병역법을 도입했다. 대신 항균법으로 줄어든 국가 세입은 다른 세금으로 보충됐다.

그러나 이는 농민들에게 새로운 부담이 되었고, 발아법 시행의 당초 목적은 달성되지 못했다.